기득권에 의한 성리학의 패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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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득권에 의한 성리학의 패륜
  • 추연창
  • 승인 2019.08.10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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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구 대 학 교 박 수 룡 교 수
대 구 대 학 교 박 수 룡 교 수

성리학은 중국 송() ·()나라 때 학자들에 의하여 성립된 학설로 꼽을 수 있으며 도학(道學) 이학(理學) 성명학(性命學) 또는 이것을 대성시킨 이의 이름을 따서 정주학(程朱學)이라고도 한다.

춘추전국시대(BC 8세기BC 3세기)에 활약한 학자와 학파의 총칭. 이시기에는 국가사정이 서방의 유목민인 견융이 호경을 공략한 이듬해에 주가 수도를 동쪽의 낙양으로 옮기고 난 뒤부터 진()이 한 · · 조로 분열할 때 까지를 춘추 시대라고 하며, 그 뒤 진()이 중국을 통일하기까지를 전국 시대라고 한다, 주 왕실이 명목상의 권위를 유지하고 있던 춘추 시대에는 오패가 나타났으며, 다음의 전국 시대에는 칠웅이라 불리는 강국들이 힘을 겨루었다.

이 사이에 주의 봉건제도가 해체되었으며, 새로운 질서 형성의 길을 찾아 사상계가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춘추 전국 시대는 중국 전통 사회의 기본적인 성격이 형성된 시기였다. 약육강식의 정복 전쟁으로 여러 제후국이 7개의 강국에 통합되었다. 아울러 이 시대에 철제 농구, 우경(牛耕), 관개 시설이 보급되고, 생산력이 증대되었으며, 사상적으로 제자백가가 등장하였다.

제자(諸子)'란 여러 학자들이라는 뜻이고, '백가(百家)'란 수많은 학파들을 의미한다. 곧 수많은 학파와 학자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사상과 학문을 펼쳤던 것을 나타낸 시기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학(儒學)은 중국 사상의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그것이 성립되던 상대(上代)에는 종교나 철학 등으로 분리되지 않은 단순한 도덕사상이었으며, 그 대표적 인물에 공자(孔子)와 맹자(孟子)가 있다. 공자는 춘추시대의 어지러운 사회를 바로잡으려고 천하를 주유하면서 인()과 예()를 설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고향에 돌아와 육경을 제자에게 가르치며 도리를 후세에 전하였다.

선진시대에 이르러 유학은 도덕 실천의 학으로서 크게 일어났으나, 시황제(始皇帝)의 분서갱유로 큰 시련을 겪은 다음 한, 당대(漢唐代)에는 경전을 수집 정리하고, 그 자구에 대한 주()와 해석을 주로 하는 소위 훈고학(訓學)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송, 명 시대에 이르러 유학은 정치적 또는 종교적 사회체제의 변화에 따라 노불사상을 가미하면서 이론적으로 심화되고 철학적인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 북송(北宋)의 정호는 천리를 논하였고 그 아우 정이는 성즉리의 학설을 폈으며, 그 밖에 주돈이(周敦頤) 장재(張載) 소옹(邵雍) 등이 여러 학설을 편 것을 남송(南宋)의 주희가 집성 정리하여 철학의 체계를 세운 것이 성리학으로, 일명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한다, 한편, 이와는 달리 육성산은 심즉리를 주장하였는데, 대개의 경우는 성리학이라 하면 주자학을 가리킨다.

성리학은 이(()의 개념을 구사하면서 우주의 생성과 구조, 인간 심성의 구조, 사회에서의 인간의 자세 등에 관하여 깊이 사색함으로써 한, 당의 훈고학이 다루지 못하였던 형이상학적, 내성적, 실천철학적인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유학사상을 수립하였다. 그 내용은 크게 나누어 태극설, 이기설, 심성론, 성경론으로 구별할 수 있다.

이 학문이 고려에 진정한 학문으로 인정받은 시기는 고려 고종의 집권시기이다, ()의 학자들 중에 일부가 전쟁과 불안한 미래를 염려해 학문을 완성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상대적으로 약한 고려에 들어와 학문 활동을 하며, 고려의 유망주들에게 성리학을 가리키는 시대가 열린 것인데 고려고종은 송()의 파국으로 전쟁을 피하여 고려로 귀화한 송()의 학자들에게 중앙정치무대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 하였고, 이때 고려의 유학들이 성리학에 집중하여 학문을 이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은 개국하면서 국교를 성리학으로 정하여, 정부가 인정한 학문이 되면서 성리학에 대한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하였으며 이 성리학의 대표적인 신라, 고려, 조선의 학자 18인을 대성전에 배양하게 된다, 대성전에 배양된 학자들은 신라2, 고려2, 조선14명으로 이들을 세운 자들은 조선의 정부로서 진정성이 떨어지는 내용도 일부 포함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신라의 학자 최치원과 설총은 성리학적 과업이 미비하다고 볼 수 있는 점이 있고, 고려의 성리학을 전수한 원조학자들을 배제하고 조선의 정치인들을 14명이나 세운 것은 당시 조선의 의용학자들의 사견이 결정적인 원인이 아닌 가 사료되며, 조선의 성리학 줄기는 대표적으로 사림출신들을 필두로 정도전을 시작으로, 퇴계 이황, 마지막으로 우암 송시열이 송자대본을 만들므로 성리학은 조선에서 완성되게 된 것이다.

성균관 대성전에 문묘 배양된 학자들 중에 정도전을 비롯해 고려의 성리학을 전수한 성리학의 원조 학자들이 배양되지 못한 점은 아쉬운 일이다, 아마도 이것이 기득권자들의 역사에 대한 왜곡이고 이해타산이며, 선조들의 업적에 대한 패륜행위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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