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은 국군 창설자인가
상태바
김원봉은 국군 창설자인가
  • 박수룡
  • 승인 2019.06.10 12:06
  • 조회수 17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수룡대구대학교 교수

김원봉은 경남밀양에서 태어나 (18981958)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제1지대장 및 부사령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그를 두고 최근 문재인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항일 무장독립투쟁가 약산 김원봉을 '국군 창설의 뿌리'라고 평가한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에 보수야권이 거세게 반발했다. 이에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등의 범여권은 문 대통령의 발언을 옹호하는 등 정치권의 반응이 엇갈렸다.

김원봉의 발자취는 '국군 창설의 뿌리'인가 아닌가를 알면 답을 확실한 것이다, 김원봉은 밀양에서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1908년 보통학교 2년에 편입하였으며, 1910년에 인근 동화중학 2년에 편입하였다. 1913년에는 서울의 중앙학교에 다니기도 하였으며, 1916년 중국에서 독일어를 배우기도 하였다, 1918년에는 김약수, 이여성 등과 난징(南京)의 진링대학[金陵大學]에 입학하면서 중국에서 망명 생활을 시작하였다. 3·1운동의 소식이 전해지자 귀국하는 김약수, 이여성 등과 헤어져 길림(吉林)을 거쳐 서간도에서 폭탄제조법을 습득하는 등 일제와의 무장투쟁노선을 분명히 하였다.

191912월 윤세주, 이성우, 곽경, 강세우 등과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고 의백단장에 피선되었다. 의열단의 암살대상은 이른바 칠가 살(七可殺)에 해당되는 자들로서 조선총독 및 총독부 고관, 군부 수뇌와 매국적 친일파 거두 등이었다. 그들은 본거지를 만주와 상해·난징 등지로 전전하면서 국내의 경찰서 폭파, 요인 암살 등 무정부주의적 투쟁을 지속하였다.

6년여에 걸쳐 의열단 단장으로 대규모 암살계획 및 경찰서·동양척식주식회사 등에 대한 폭탄 투척사건 등을 배후에서 지휘 조종하며 무력 항쟁에 의한 일제와의 투쟁을 지속하였으나, 연합투쟁 및 조직투쟁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6년에는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훈련생으로 입소하여 투쟁노선을 변경하였다.

1927년에는 중국 국민당의 북벌에 합류하였고, 1929년 상해에서 정치학교를 개설하고 1932년 난징에서 조선인혁명 간부학교를 창설하는 데 중국 국민당계의 도움을 받았다. 1930년경 북경에서 조선공산당 엠엘파(ML)인 안효구와 제휴하여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결성하고, 레닌주의정치학교를 개설하고 기관지 레닌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193211월에는 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여 혁명세력의 결집을 꾀하였다. 1935년에는 신한독립당·한국독립당·대한독립당·조선혁명당·의열단의 5개 단체를 규합하여 한국민족혁명당1937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칭 을 조직하였다. 1937년 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우한(武漢)으로 가서 조선민족혁명당이 중심이 되어 전위동맹 혁명자연맹 민족해방연맹 등 단체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여 대일선전전에 주력하였다.

1938년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동의를 얻어 조선의용대를 편성하고 대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장개석(蔣介石)의 주선으로 김구(金九)와 함께 각 혁명단체가 공동 정강하에 단일조직을 만들 것을 제의하는 동지동포에게 보내는 공개서간19395월 발표하였다.

이러한 중국 국민당과의 관계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합작노력은 최창익 등과 달리 당시의 민족운동은 계급에 기반을 둔 공산주의운동이 아니라, 일본과의 투쟁을 위한 연합전선 결성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노선에서 출발하였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으로부터는 소시민적 기회주의자이며 개인영웅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자신이 조직한 조선의용대의 대원들이 이탈하여 김두봉의 독립동맹으로 흡수되기도 하였다.

위와 같은 김원봉의 이력을 볼 때에 문재인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항일 무장독립투쟁가 약산 김원봉을 '국군 창설의 뿌리'라고 평가한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맞다 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야당들은 발끈하며 색깔론으로 대처하는 것이 의외라고 할 것이다.

다만 김원봉이 독립운동의 선구자고, 민족을 위해 투쟁한 공은 치하해야 하고, 북한 김일성 공산주의와 결합하여 동란으로 수많은 민족들이 희생당한 것에 대해 그에게는 오직 하나의 조국을 갈망하다보니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전쟁까지도 불사한 것은 과오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여, 야 모두 이런 이유로 국정을 뒤로하고 정쟁으로 몰고 가는 것은 옳지 않다, 역사는 후세가 평가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