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득권을 포기못하면 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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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득권을 포기못하면 망한다
  • 추연창
  • 승인 2019.04.18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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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득권을 버리지 못하면 망 한다

조선(朝鮮)은 건국아래 유교(儒敎)를 국교로 하여 불교(佛敎),미신, 잡 종교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오직 성리학의 토대위에 우뚝 서면서 정권을 유지하고 명분을 세워 왔으며, 국민정서를 완전히 장악하였고 이에 마치 유교가 정통조선의 가보이고 조선만의 역사로 비칠 정도로 정착이 되어왔던 것이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선조임금시대에 임진왜란으로 국세가 기울어져 정권유지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여 민심은 흉흉하여 민초들이 고개를 들고 국가에 반기를 들기 시작할 쯤 양명학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조선중후기에 1672년~1736, 현종, 숙종, 영조에 3대를 거쳐 영의정에까지 이르게 된 정제두가 깊이 파고들어 이를 시발로 상당한 호응을 얻게 되었는데 이에 성리학에 지친학자들이 양명학을 본격적으로 답습하기 시작한 것이다, (박제가, 박세당 등)하지만 유교를 절대시하는 당시정권에 발각되는 날에는 주검을 면치 못하는 위험도 따랐던 것이다.

양명학은 당시 민초들의 호응을 얻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여러 가지 잡 종교들이 계룡산을 중심으로 전국에 발생하여, 동학이라는 종교도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면서 민란을 일으키며 조선의 붕괴 서막을 올리게 된 것이다.  

명성왕후는(1851~1895)는 조선시대사 뿐만 아니라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매우 독특한 행보를 보여준 왕비였다. 역사상 권력의 정점에 오른 왕비들은 종종 있었지만, 그들이 권력을 쥔 것은 지아비인 왕이 죽고 난 뒤, 아들이나 손자를 내세워 수렴청정을 하면서 명문가인 친정을 등에 업고 왕을 뒤에서 조종하는 놀라운 기질을 발휘한 장본인이다, 명성황후는 이전의 왕비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녀는 지아비인 이 국정을 의논하는 가장 가까운 상대였으며, 외국의 세력들이 고종보다도 더 예의주시했던 권력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었다. 그녀는 명문가 친정의 도움으로 왕비 자리에 오르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이 왕비가 되어 정치적 필요에 의해 친정세력을 키웠다. 살아 있는 왕보다도 더 주목받으면서 사실상 왕과 권력을 나눠 가졌다고도 보이는 명성황후의 존재는 당시 망국으로 치닫는 조선의 특수상황을 고려하고 생각하여도 매우 특이하다.


명성황후는 여주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이름은 자영이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그녀가 태어난 집안은 숙종을 두고 장희빈과 삼각관계를 겨루었던 왕비, 인현왕후를 배출한 민씨 가였다.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은 인현왕후의 아버지였던 민유중의 5대손이었다. 이런 가계를 통해 볼 때 명성황후 집안은 당색으로는 서인 계였고 아버지 민치록이 세도정치기인 철종 때 음서로 관직에 오른 것을 보면 그때까지도 꽤 내로라하는 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민씨의 아들 고종이 보위에 오른 지 10여 년이 되어 성인이 된 고종도 더 이상 전제적인 아버지 대원군의 간섭 없이 자신이 왕인 나라를 자기 스스로 다스려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대원군이 꼼짝할 수 없도록 자신들의 세력을 서서히 형성하여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였다. 또한, 외세에 대한 정치적 입장이나 경복궁 중건 등으로 인한 대원군의 거듭된 실정이 왕의 친정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증폭시키고 있었기에 이를 적극 이용하였다. 마침내 1873년 고종과 명성황후는 최익현이 대원군의 실정과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게 하여 이를 계기로 고종 친정을 선포함으로써 대원군을 권력의 중심에서 축출했다.

고종은 친정 직후 대원군 집권 시의 쇄국을 풀고 일본과 수교하였고 이후 차례로 서양의 열강들과 수교를 맺어나갔다. 그러나 이전의 강력한 통상수교거부정책(쇄국정책)으로 미처 외세에 대해 준비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개방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개국 이후 내적으로는 여전히 남아 있는 대원군과의 대립과 기존 세력과의 갈등, 외적으로는 조선의 국권을 침탈하고자 하는 일본과 서구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고종과 명성황후는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하면서 외줄타기를 하듯 위태로운 상황에서 정국을 운영하였다.


기득권을 포기 못하는 명성황우는 1882년 別技軍(별기군)에 대한 武衞營(무위영)의 불만이 표출된 임오군란이 터지고 명성황후가 힘을 기르기 위해 키웠던 민씨 세력이 위협 당하자. 명성황후마저도 그 신변의 안전을 도모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명성황후는 궁궐을 탈출하여 장호원에 은거하였고 임오군란을 계기로 일시적으로 정권을 되찾은 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죽었다고 선포하고 국장까지 치르려고 하였다. 이때 명성황후는 고종에게 자신이 건재함을 알리고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도록 하였다. 청나라 군대의 출동으로 대원군은 청으로 압송되었고 명성황후는 궁궐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때부터 명성황후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민씨 종친들의 힘을 모으는 다소 파행적인 정국 운영을 해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외세에 의한 왕비살해는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적으로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국내에서는 일본에 왕비 살해의 원한을 갚자는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을미의병이 일어났고 국제적으로는 일본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드높아졌다. 시아버지였던 대원군은 이 틈에 잠시 정권을 되찾는 듯 했지만, 고종이 이미 아버지마저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러시아 공관에 안전을 의탁하는 아관파천을 행함으로써 곧 실각하였다. 명성황후의 시해 사건으로 인해 조선은 국격을 훼손당하고 망국으로 가는 길을 한발 더 내딛게 되었다.

기득권을 포기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군주들의 어리 섞은 판단으로 결코 조선의 역사는 고종의 아관파천과 외세 일본의 조선왕비 시해사건으로 막을 내리고 만 것이다, 지금 반대급부로 고종이나, 명성황우,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내려놓고 백성위주로 정책을 행하였더라면 망국의 길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문재인 대통령도 시대와 상황은 다르지만 국정을 신중하게 판단하여 국가의 장래에 누가 되지 않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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