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적 양심과 올바른 학문적 태도
상태바
학자적 양심과 올바른 학문적 태도
  • 박태병
  • 승인 2020.06.04 10:31
  • 조회수 6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학자적 양심과 올바른 학문적 태도

한겨레 신문에 연재되는 경희대 사학과 교수라는 자의 타이틀로 된 글의 제목을 보니 “신라인들은 왜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을 흉노로 자처했을까” 이런 센데이서울에서나 나올만한 비과학적이고 가짜 사이비 글들이 대학 교수라는 탈을 쓰고 인터넷에 범람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학자적 양심도 없고 학문적 근거가 미약하고 부실한 글들로 식민지 기부 기득권층 쓰레기들이 오랜동안 쌓아놓은 적폐를 일거에 일소하고자 무사시로 나섰다. 거짓과 혼란을 부추기는 말세의 혼탁을 일거에 쓸어 버리고자, 이순신 장군의 맹서문 “三尺誓天 山河動色 一揮掃蕩 血染山河” (삼척서천 산하동색 일휘소탕 혈염산하), “삼척장검을 들고 하늘 앞에 맹세하니 강산도 감동하여 색깔을 바꾸는도다”의 결기를 담은 나의 담대한 선언이 이제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다.

이런 학자같지도 않는 자들이 써댄 글을 다음과 같이 그대로 인용한다: “문무왕릉비에는 신라인이 생각하는 자신들의 기원을 더 구체적으로 추정할 수 있는 글자도 있다. 그의 비에는 진백(秦伯)이라는 사람도 나온다. 이 이름은 ‘진목공’(秦穆公)을 의미하는데 그는 진시황의 22대 선조로 중국 서부에서 유목민들을 평정하고 진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었다.”
이런 사이비작자들의 말대로, 정말 문무왕릉비문에 “진백(秦伯)이라는 사람”이 나올까?
제아무리 까막눈들이라고 해도 사람의 양심까지 까막눈은 아니지 않는가?
문무왕릉비 탁본에 의거 판독한 유희애의 비문판독문을 똑똑히 보라.
두 눈 똑똑히 뜨고 쳐다보라. 문무왕릉비 비문 글자는 “진백(秦伯)”이 아니라 “泰伯”(태백)이라는 글자가 분명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한겨레 신문에 나온 이런 가짜 사이비 학자들-명색히 사학과 대학 교수라는 타이틀을 갖고 글 모르는 사람들 모아놓고 사기쳐 가면서 호의호식해온 이런 사이비 망령 작자들이 그동안 주구장창 외쳐왔던 근거가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지게 된다.

나의 책은 까막눈들 데리고 모와 놓고 사기치는 사이비 학자들과는 전연 다르게 실물과 역사와 사료와 고고학적으로 입증되는 실증주의에 따른 객관적인 해석에 기반하여 논리적으로 정확하게 설명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나의 책은 한국사를 발칵 뒤집어 놓는 반만년 한국사의 위대한 혁명을 불러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비문의 글자판독은 “진백”이 아니라 “태백”이다. 그리고 "태백"이 되어야 “태백지기”라는 비문 구절의 문맥상 의미가 해석된다.

“更興泰伯之基”(경흥태백지기)를 국편위는 “진백(秦伯)의 터전를 다시 일으켰다”고 해석했으나, 이 문장은 ‘오나라 시조 오태백은 덕치에 기반하여 새나라를 건설했는데, 그와같은 도덕정치로 민족 중흥의 선물을 가져다 주었다’는 의미이다. 국편위는 “泰伯”(태백)을 “秦伯”(진백)으로 오판했다. 비문앞면24행의 “泰伯之基”에 대해서 국편위는 “秦伯”(진백)으로 판독했으나, 추홍희저자는 “泰伯”(태백)으로 판독하고 오나라 시조 오태백으로서 해석하여 ‘민족 중흥’의 의미와 그 조건을 풀어냈다.

泰伯之基泰伯(태백)泰伯(태백)은 오나라의 시조 오태백을 지칭한다. 오월춘추의 오태백전, 사기의 오왕세가를 참조하라. 왜 사마천이 오태백을 세가 중 맨 첫 번째로 올려 놓고 추앙했는지 그 이유가 무언가 있지 않았겠는가? 정치이념이 다른 공자가 왜 오태백을 논어에 기술하고 칭송했겠는가? 德(덕)의 정치를 펼쳐서 천하의 인심을 얻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던 오태백이었다. 오태백은 덕의 대명사인 것이다. 오태백의 정치 기초는 德治(덕치)에 있었다.

성인군자의 대명사 오태백의 정치이념의 기초인 덕화의 물결이 다시 부흥하게 되는 큰 선물을 받게 되었다는 의미가 비문의 내용으로 보인다. 이런 후사는 바로 조상의 음덕이 아니겠는가? 오태백의 天下三讓(천하삼양)의 미덕은 김춘추의 천하삼양 고사로 이어진다. 김춘추가 하늘에서 그냥 떨어진 사과가 아니지 않는가? 훌륭한 선조 오태백의 후손이기 때문에 오태백의 부활의 그의 화신으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민족중흥의 황금 시대의 부활은 누구에게 달려 있을까? 천의인가? 인사인가? 도와 덕의 정치 개념에 대해선 운급칠첨의 총서도덕(總敘道德) 부분을 참조하라.

진백 秦伯秦伯(진백)은 민족중흥의 기틀을 닦았다는 의미로는 적합하지 않는 말이다. 왜냐하면 진백은 주나라가 쇠퇴한 결과로 나타난 역사이기 때문이다. “平王之时 周室衰微 諸侯强并弱 齊 楚 秦 晋 始大 政由方伯”. 주평왕(周平王, BC 781-BC 720)은 BC 770년 주나라 수도를 낙읍으로 옮기는 동천을 단행했다. 귀족들의 발호가 심해지자 천자국인 주나라가 쇠약해지고 대신 제후국들인 초나라 제나라 진나라가 강성해졌는바, 함곡관 서쪽의 하서 지방은 주양왕(周襄王) 때 진나라를 “秦伯”(진백)으로 봉해서 서쪽의 우두머리 제후국으로 강성해지고, 결국 춘추전국시대 들어서 진(秦)・연(燕)・제(齊)・초(楚)・한(韓)・위(魏)・조(趙)의 전국칠웅(戰國七雄)이 나타나 최강대국 진나라에 대항해서 합종연횡책을 구사하면서 서로 패권을 다투는 혼란을 거듭하게 되었다.

秦伯嫁女(진백가녀)또 진백가녀(秦伯嫁女)라는 고사성어의 의미에서도 진백을 민족중흥의 의미로써 쓸 수 없다. 진백가녀(秦伯嫁女)는 진(秦) 목공(穆公)이 진(晋)나라와 결맹을 맺고 자기의 딸을 진나라 공자에게 시집을 보낼 때 금은비단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시녀들을 70명이나 함께 딸려보내면서 진공자가 자기 딸을 어여삐 봐줄 것으로 기대했으나 오히려 정반대로 진공자는 공주 대신 딸려온 시녀를 사랑해버리는 바람에 애초에 기대한 결과가 망쳐지게 되었다는 고사에서 실질은 도외시하고 겉만 화려하게 겉치레하려는 속빈 생각을 질타하는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다. 겉치레를 배격하는 사상을 강조하였던 묵자와 한비자 또한 당연하게 진백가녀를 질타했다.

      (추홍희, <위대한 한국 문무대왕릉비 연구:제1권>, 293-296 인용).

문무왕릉을 발견하고 비문을 해석한 호주변호사 추홍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