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치술과 직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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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술과 직언
  • 이준걸 전 ∙ 국사편찬위원회 사서실장
  • 승인 2014.07.31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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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준 걸 / 전 ∙ 국사편찬위원회 사서실장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마상(武)에서 천하를 잡았으나 문(文)에서 천하를 다스린다”고 열두 아들과 학자들을 지방으로 내려 보내 문고(도서관)을 설치하고 출판사업의 장려와 학문을 증진시켜 그 통치술을 학자로부터 얻고자 적격자를 물색하였다. 초려삼고로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가를 여러 번 만나 정치 고문으로 협조를 부탁했으나 그는 학문에만 증진한다며 끝내 사양하고 하야시 라산을 천거 받아 중신으로 삼았다.

도쿠가와는 측근을 물리치고 후지와라의 문인인 기노시타 데이강이 길러낸 이른바 <기노몽(木門) 5선생과 10철(哲)>이 등용되어 도쿠가와 치하의 문권, 교권,정권에 관여하여 소신 끝 역량을 펼쳐 나라의 안정과 문예부흥을 일으켜 그 유업이 15대장군 256년간 한국과 가장 좋은 선린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도쿠가와의 진면목의 진수는 “중신 간부가 자신과 마음이 맞는 부리기 쉬운 사람만을 중시하면 진정 인재는 없어져 버린다. 그래서 측근을 멀리하고 정말로 인재는 없는가 하고 보물을 찾는 의욕으로 넓고 깊게 찾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그래서 정치 덕목의 첫째를 용인(用人 ∙ 인사관리)에 두고, 다음에 이재(利財 ∙ 경제정책)에 치중하여 통치 치적에 승부를 걸었다. 이 두 가지도 오로지 학문에서 유래한다고 굳게 믿었다. 사실 “인류가 자연으로부터 선물 받지 않고 인간의 정신으로 창조해낸 수많은 물건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은 책의 세계다”라는 말은 인간이 언어동물로 남아 있는 한 변함없는 진리임을 굳게 신봉한 듯 도서관에서의 출판 사업에 전력투구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일본에 ⌜아즈마가가미(吾妻鏡)⌟라는 책이 있는데 주제는 나의 잘잘못은 곧 아내의 얼굴에서 나타나므로, 아내를 살펴보면 나의 잘잘못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통치자의 공과는 백성들이 쓴 글속에서 나타난다는 뜻이다. 그래서 도쿠가와는 이 책을 펼쳐보고 각별히 백성들의 여론에 신중을 기했다고 한다.

당나라 태종은 대신들을 모아놓고 “나는 거울로 의관을 보고, 역사로 나라의 흥망성쇠를 보고, 백성들의 말을 듣고 자신의 통치술을 비추어 본다”는 세 가지 거울인 삼경자조(三鏡自照)로 언제나 자신의 과오를 미연에 방지하였다고 털어 놓았다.

조선시대 성종은 “잘못을 지적 받지 못하는 것 보다 더 큰 아픔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승지와 사관 ∙ 육조 ∙ 삼사 등의 우두머리를 불러 놓고 각각 붓 40자루와 먹 20개씩을 주어 “이 필묵은 딴 데 쓰지 말고 오로지 나의 과실을 써 올리는데만 쓰되 빨리 닳을수록 크게 은사(恩賜)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사필묵(賜筆墨)은 후세 임금의 모범을 보인 표본이 되었다. 이를 본받아 앞으로의 위정자는 가장 신랄하게 비평하는 언론이나 단체 및 개인에게 푸짐한 포상을 한다면 <새마을 운동>의 견학을 능가하는 세계적 관심이 <위정(爲政)의 꽃>구경으로 동방의 코리아로 몰려들 것은 자명한 이치로 보인다.

어진 임금 세종은 자신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을 극구 반대한 황희와 이직을 왕위에 오른 뒤 귀양지에 있는 그들을 불러 올려 정승의 관직에 다시 중용시켰다. 이런 도량과 관용지겸손은 지금의 위정자에게 기대하는 것이 영 백년하청만은 아닐 터인데 다만 나라의 형세가 어쩌다 궤도 이탈에서 온 국가의 동량으로서는 너무나 협량의 심지(心志)들과 잠시 해후하게 된 것 뿐이니 희망은 얼마든지 남아있다.

어릴 때 신동이라 불린 서거정은 대사헌을 두 번이나 지내면서 조선시대 언관(사헌부 ∙ 사간원 관리)은 임금에게 항상 바른 말을 하여 그릇된 언행이 없도록 보필할 책임이 있어 항상 감시하고, 빗나가는 것을 막고,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을 북돋아 주는 것을 사명으로 하였다. 그는 언관의 기개를 “벼락이 떨어지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서슴치 않는다”고 하면서 그것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고, 나라가 잘 되면 명군이 되고 명군 밑에 충신 있게 마련이라고 간언을 격려하였다.

1517년 강원도에 큰 눈이 내려 보리가 얼어 죽자 특진관 이자건이 중종임금 면전에서 “성심이 지극하지 못 하여 재난을 입었다”고 하였다. 자연 재해까지도 임금의 실덕에서 그렇다고 직언하였다. 그리고 대사헌 조광조(동방4현의 한사람)는 중종에게 맞대어 “어진 임금은 대간(사헌부 ∙ 사간원 관리)의 말을 귀담아 듣고, 옳지 않은 임금은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고, 대간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한다. 지금 대간들이 간절히 논계하고 사직하는 것은 충정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상을 주고 감복할 일을 전하는 위엄으로 물리치고 사기를 꺾어 버리니 옳지 않은 일입니다. 전하의 성덕과 학문으로 이 지경에 이르실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라고 사정없이 직언했다.

중종은 그럼 “어떻게 하면 정치를 잘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조광조는 “군자와 소인을 가려서 쓰면 됩니다.”가고 하니 임금은 “구별할 수가 없다”고 해, 조광조는 “군자는 겸손하여 스스로 숨어 살고자 하기에 찾아보기 어렵고, 소인은 아는 척 싸다니기 때문에 잘 보인다”고 하였다. 과연 인사가 만사라 인재등용이 정치의 승패를 가름하는 요체가 된다는 것이 지나친 말이 아니다.

간 큰 남자 임숙영은 1611년 과거시험에 <나라에서 가장 화급한 사안에 대한 대책을 논하라>는 시무(時務)가 출제되었다. 그는 서슴없이 “정신 못 차리는 임금이 가장 화급한 문제”라고 답하였다. 그리고 “임금의 실수와 허물에 대해 삼가 죽기를 무릅쓰고 대답하겠습니다. ∙ ∙ ∙ ∙ 임금의 실수는 국가의 병입니다. 자만심을 버리고 신중한 마음을 가지십시요.” 그것도 바로 절대 군주인 광해군 앞에서 치른 시험에서 내놓은 답이다. 이 때 다수의 감독관이 광해군이 두려워 낙방을 시키려 했으나 심희수라는 감독관이 고집해 급제시킬 것을 주장해 합격하고, 사헌부 지평을 역임하였다. 성격이 강직하여 옳곧은 시무에 유소문(儒疏文)은 대부분 그가 맡아 썼다. 신하들의 주장으로 구제된 임숙영은 관리로서 소신을 십분 발휘하고, 직언에 숨어있는 내면세계 즉 민초들의 생각을 유감없이 표출했다. 요즘도 이런 공복이 없는 것은 아니나 들어 내놓고 업무를 처리하다간 어느 귀신이 잡아가지는 않더라도 백수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가 아닐까 싶다.

영남학파의 거두 남면 조식은 조선 중기 학자로 상소문에 “대비(문정왕후 ∙ 중종의 비)는 성실하고 뜻이 깊다 하나 으슥한 구중궁궐 안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명종)는 아직 어리니 고아일 뿐입니다.”라고 무능한 왕권을 대놓고 신랄히 비판하였다. 퇴계는 이를 두고 고항지사(高抗之士)라고 높이 평가 하였다.

조식은 회재 이언적의 천거로 헌릉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불응하고, 단성현감에 피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퇴계가 벼슬에 나오라고 하였으나 듣지 않다가 상서원 판관을 받아 명종을 뵙고 <정치의 도리와 방법>을 표로 적어 올리고 다시 산으로 들어갔다. 이후에도 계속 부름을 받았으나 끝내 나가지 않고 두류산에 <산천재>란 당호를 짓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이렇게 임금을 대놓고 “정신 못 차린 경솔한 통치자라고 극언을 내뱉었는데도 관리로 등용코자 여러차례 시도한 그 너그러운 이해와 감싸주는 포용성에 지금의 인사 관리 정책과 비교해 보면 용인술(用人術)이 얼마나 속 좁은 우물 안 개구리로 후퇴했는지 알 수 있다.”

당나라 현종 때 재상 한유는 매우 강직해 현종의 잘못을 면전에서 서슴없이 그 부당성을 지적했다. 이를 보다 못한 측근이 “왜 한유를 내치지 않느냐”고 묻자 현종은 “한유 때문에 하루도 즐거운 날이 없고, 항상 잠도 편히 자지 못 해 이렇게 말랐지만, 그 대신 나라가 살쪄 천하가 편하지 않았는가”라고 거부의사를 피력했다.

과연 현군 밑에 충신난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다. 측근을 멀리하고 아부를 극히 경계하며 듣기 거북한 직언일수록 깊은 반추로 그 고언을 음미 해 보는 현종 같은 위정자와 나라가 잘 되라고 임금 앞에 막말하는 한유 같은 재상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국민들은 바란다.

늘품수 없이 꽉 막혀 내 사람만 챙기는 소심한 도량의 지도자로서는 국가 경쟁사회에 나라의 품격은 급전직하로 내려앉게 마련이다.

한 국가의 품격은 사회구성원 전체가 만들어가는 꽃이며 향기다. 품격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에서 이루어진다. 특히 나라의 지도자의 언행은 그 나라의 품격 즉 국격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지체나 신분에 알맞은 언사로 체면을 지키는 것은 최소한의 예의이며 미덕이다.

조선시대 임금의 부당한 판단이나 명령 및 행동을 실록에 가차 없이 기록하며 꾸짖는 사관에 이르기까지 권력에 맞서 싸운 당시 관리들의 기개의 참모습이 정말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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