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를 찾아서 金時習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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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를 찾아서 金時習 편
  • 추연창 기자
  • 승인 2014.07.10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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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를 찾아서 金時習 편 
 

김시습(金時習) 의 묘

우리나라 최초 한문소설 (금오신화)의 작가인 김시습은 본관은 강릉이며1435~1493인물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기를 금오신화의 저자로 쉽게 기억 된다 천재시인으로 어릴 적 부터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아 오다가 세조의 반란으로 그는 단종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키며 벼슬의 꿈도 접고 자연에 은거한 생육신 중에 한사람이며 방랑생활을 하며 소설을 쓰고 유랑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뒤로한 인물이다

김시습이 기거하던 무량사

어디 그런 선비가 이분밖에 없겠는가? 시대는 인재를 요구하나 인재는 시대를 거역하고 올곧게 살면서 비리를 못보고 목숨을 바쳐서라도 항쟁하다가 최후를 맞이하고 이름을 남기는 것이 선비이다

그의 증조부 윤주는 안주목사였고 할아버지 겸간 은 오위부장, 아버지 일성 은 충순위(忠順衛)를 지냈으며, 그의 어머니는 울진의 장씨(張氏)이다.

김시습은 서울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났다. 1437년(세종 19) 3살 때부터 외조부로부터 글자를 배우기 시작하여 한시를 지을 줄 아는 천재였다. 소학(小學)을 배운 후 5세 때 이미 시를 지을 줄 알아 그가 신동이라는 소문이 당시의 국왕인 세종에게까지 알려졌다. 세종이 승지를 시켜 시험을 해보고는 장차 크게 쓸 재목이니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하고 선물을 내렸다고 하여 오세라는 별호를 얻게 되었다.

5세 때인 1439년(세종 21)에는 이웃집에 살고 있던 예문관 수찬(修撰)이계전 으로부터 중용과 대학을 배웠고, 이후 13세인 1447년(세종 29)까지 이웃집의 성균관 대사성김반에게서 맹자, 시경, 서경을 배웠고, 겸사성 윤상에게서 주역을 배웠고, 여러 역사책과 제자백가는 스스로 읽어서 공부했다고 한다.

그는 훈련원도정 남효례 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원만한 가정을 이끌지 못하였다. 혼전어머니의 죽음은 인간의 무상함을 깨닫게 되었고, 18세에 송광사에서 선정에 드는 불교입문을 하였다. 그 후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로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였다.

21세 때인 1455년(세조 1년)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의 왕위찬탈[계유정난(癸酉靖難)] 소식을 듣고, 3일간 통곡을 하고 보던 책들을 모두 모아 불사른 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산사를 떠나 전국 각지를 유랑하는 길을 택했다.

김종서, 황보인 등의 사육신이 처형되던 날 밤 온 장안 사람들이 세조의 전제에 벌벌 떨고 있을 때에 거리에서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진 사육신의 시신을 바랑에 주섬주섬 담아다가 노량진 가에 임시 매장한 사람이 바로 김시습이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이후 그는 관서지방을 유람하며 역사의 고적을 찾고 산천을 보면서 많은 시를 지었다. 이는 매월당집에 탕유관서록 으로 남아 있다.

그가 쓴 발문에서 방랑을 시작한 동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질탕(跌宕)하여 명리(名利)를 즐겨하지 않고 생업을 돌보지 아니하여, 다만 청빈하게 뜻을 지키는 것이 포부였다 하였다.

26세 때인 1460년(세조 6년)에는 관동지방을 유람하여 지은 시를 모아 탕유관동록을 엮었고, 29세인 1463년(세조 9) 때에는 호남지방을 유람하여 탕유호남록을 엮었다.

그 해 가을 서울에 책을 구하러 갔다가 효령대군의 권유로 세조의 불경언해사업에 참가하여, 교정 일을 맡아 열흘간 내불당에 거쳐한 일이 있었다. 1465년(세조11년) 원각사 낙성식에 불려 졌으나 짐짓 뒷간에 빠져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평소에 경멸하던 정창손 이 영의정이고, 김수온이 공조판서로 봉직하고 있는 현실에 불만을 품고 31세 때인 1465년(세조11년) 봄에 경주로 내려가 경주의 남산인 금오산에 금오산실 을 짓고 칩거하였다. 이때 매월당이란 호를 사용하였다.

이곳에서 31세(1465) 때부터 37세(1471)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불리는 금오신화를 비롯한 수많은 시편들을 유금오록에 남겼다.

그동안 세조와 예종이 죽고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1471년(성종2년) 37세에 서울로 올라와 이듬해 성동 폭천정사 수락산 수락정사 등지에서 10여 년을 생활하였으나 자세한 것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1481년(성종12년) 47세에 돌연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안씨를 아내로 맞아들여 행복을 되찾은 듯 했으나, 이듬해 폐비 윤씨 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관동지방 등지로 방랑의 길에 나섰다. 당시 양양부사였던 유자한과 교분이 깊어 서신왕래가 많았으며,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강릉, 양양, 설악 등지를 두루 여행하였다.

10대에는 학업에 전념하였고, 20대에 산천과 벗하며 천하를 돌아다녔으며, 30대에는 고독한 영혼을 이끌고 정사수도로 인생의 터전을 닦았고, 40대에는 더럽고 가증스러운 현실을 냉철히 비판하고 행동으로 항거하다가 50대에 이르러서는 초연히 낡은 허울을 벗어 버리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충청도 홍산 무량사였다.

이곳에서 1493년(성종24년) 59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유해는 불교식으로 다비를 하여 유골을 모아 그 절에 부도로 안치하였다. 그는 생시에 이미 자기의 초상화인 노소 2상을 손수 그리고 스스로 찬까지 붙여 절에 남겨두었다고 하나, 현재는 매월당집에 동봉자화진상이 인쇄되어 전한다.

김시습의 시 하나를 소개 한다.

有  客 (나그네)
김시습 金時習 1435(세종17)~1493(성종24)

      有客淸平寺      나그네 청평사에서
     春山任意遊      봄 산 경치 즐기나니.
     鳥啼孤塔靜      새 울음에 탑 하나 고요하고
     花落小溪流      지는 꽃잎 흐르는 개울물.
     佳菜知時秀      때를 알아 나물은 자랐고
     香菌過雨柔      비 지난 버섯은 더욱 향기로워.
     行吟入仙洞      시 흥얼대며 신선골 들어서니
     消我百年憂      씻은 듯이 사라지는 근심 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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