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3·1'이고 '33인'인가?
상태바
왜 '3·1'이고 '33인'인가?
  • 김흥순
  • 승인 2014.03.01 00: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김흥순
왜 '3·1'이고 '33인'인가?

3.1운동의 거사 일을 3월1일로 잡게 된 것은 당시 일본 유학 중인 600여명의 조선 학생들이 동경에 모여 조선기독교청년회가 작성한 조선독립선언서를 발표한 날이 2월8일 독립선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3.1운동의 주역들인 민족대표 33인의 입장에서 보면 적국의 심장부에서 터진 조선 독립운동의 열기가 채 식기 전에 우리 땅에서 다시 점화해 지속적인 민족운동으로 이어갈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 이면에는 또 종로결찰서 고등계 형사출신인 악질 신철(申哲)이 있다.

일본에 의한 독살설이 나돈 고종의 장례식이 3월3일이어서 전국에서 애도 인파가 속속 서울로 몰려들고 있어 3월3일을 거사일로 삼자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유혈충돌로 이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에, 조선의 마지막 황제였던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의견에 묻혀 3월1일로 앞당겨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3.1운동이 3월1일에 일어난 그 배후에 악명 높은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의 역할도 있었다. 신철(申哲)은 악질 중의 악질로, 일본경찰이 키운 같은 민족잡는 사냥개 1호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 친일 앞잡이였다. 10년 경력의 사냥개로 애국지사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손금 보듯 들여다보고 있었다.

2월26일 저녁 무렵 서울 안국동 사거리 근처에 신철(申哲)은 천도교 소속 인쇄소 보성사(普成社)에 들이닥쳐 권총으로 인쇄공들을 위협하고 인쇄 중인 '조선독립선언서'를 찾아냈다.

인쇄소를 급습당한 보성사 사장 이종일(李鍾一, 33인의 한 사람)은 즉시 천도교 유력자인 최린(崔麟)에게 이 사태를 보고했고, 최린은 자신의 집에 저녁식사 자리를 마련하고 은밀히 신철을 초대했다.

이 자리에서 최린은 신철에게 민족을 위해 며칠 동안만 입을 다물어 줄 것을 부탁했다. 이 때 최린은 그에게 5000원을 주며 만주로 떠나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당시 쌀 한 가마니의 값이 41원이었고, 상머슴의 1년 연봉이 쌀 10가마니 정도였기 때문에 5000원은 엄청난 거금이었다.

후일 일본 측 기록에는 신철이 그 돈을 받았다고 되어 있고, 한국 측 기록, 특히 애국지사들의 증언에는 그가 돈을 받지 않고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나갔다고 되어 있다. 어쨌든 최린의 집에서 나온 신철이 입을 다물어버림으로써 3·1운동 모의는 비밀이 유지될 수 있었다.

결국 만세운동 지도부에서는 보안상의 심각성을 고려해 3월3일로 예정된 거사를 1일로 앞당겼다. 신철은 곧 만주에서 신의주로 독립단이 잠입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며 신의주로 출장을 떠나 버렸다.

만세운동이 진압될 무렵에 일본 경찰은 신철의 배신을 알고 5월14일 서울로 압송해왔다. 결국 3.1운동 정보를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경성헌병대에 투옥됐고, 거기서 그는 1919년 5월22일 자살한다.

3.1운동에 대한 평가는 참여한 사람들의 입장에서야 당연히 각각 다르겠지만, 그 운동을 주관한 세력은 천도교의 손병희 등을 중심으로 한 민족종단 지도자들이 상당수라고 한다. 그래서 3.1독립운동 사상은 먼 옛날 천손민족이 일어나 조상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弘益人間)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한다.

세계사적으로도 홍익인간 사상은 인류 최초의 인본주의 선언이자 평화정신이라고 말한다. 세계 3대 시민혁명이라는 1648년 영국의 청교도 혁명, 1775년 미국의 독립혁명,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주장한 인권평등과 민주주의의 기본정신은 모두 홍익인간 정신과 일치하는 덕목이다.

그 홍익인간 정신으로, 또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본주의 정신으로, 1894년의 갑오농민전쟁과 동학혁명, 1904년의 갑진개화운동이 일어났었고, 1912년에 이어 갑인년인 1914년에 대대적인 민중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했었다는 것이다. 그 연장선이 바로 1919년의 3.1운동이었다.

하지만, 33인도 만해 한용운을 빼고 대부분은 변절하였고, 그 당시 학생들과 약속한 만세 장소에 나가지도 않았다.

페친 @김갑수 님은

그의 글에서 "최근 나는 베트남과 중국 혁명의 역사를 새롭게 읽으면서, 타협하거나 변절하는 아군은 적군보다도 더 해롭다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는 생각을 언급했다.

3.1절 기미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초안을 만들고 한용운이 행동강령으로 공약삼장을 추가했다. 이 선언서는 현란한 수사와 풍성한 어휘가 구사된 국·한문 혼용체의 글이다. 1918년 무오독립선언문과 1919년 2월 2·8독립선언서의 영향을 받아 작성된 이 글은 손병희의 개입으로 한층 온건하게 다듬어졌다.

자세히 보면 오늘 우리가 한국의 상징이라고 외치는 태극기, 애국가, 독립선언문까지 모두 친일파들이 만들거나 개입한 것이다. 이게 조금 어불성설이다.

페친 @김갑수님의 글
1919년 조선 계몽주의 지식인이 스스로 내세운 명분은 '비폭력 평화주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과연 그들의 말대로 조선 민중은 피를 흘리지 않았는가? 정녕 누구를 위한 비폭력이었으며 무엇을 위한 질서 존중이었는지 되묻고 싶다. 그리고 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을 '민족대표'라고 상찬하여 부를 수도 없다고 본다.

이른바 '민족대표 33인', 단적으로 말해서 그들은 나약하고 타협적이었다. 물론 그들이 무단정치의 공포 분위기에서 자금을 조달하고 선언서를 작성, 배포한 것은 선구적인 구국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선구적인 활동이 전국 운동의 기폭제가 된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순수했을까? 이를 테면 그들의 행동에 혹여 매명 욕구나 소영웅주의는 개입되어 있지 않았을까?

그들은 운동 벽두부터 타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약속한 시간과 장소인 오전 10시와 탑골공원을 일방적으로 바꿔 버렸다. 사후 그들의 말로는 '폭동의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제국주의 법정의 변론에서 그들에게 유효하게 작용되었다. 그들은 오전 10시가 아닌 오후 3시에야 탑골공원이 아닌 요릿집 태화관에 꾸역꾸역 모였다.

그들은 민중의 동향이 예상보다 거칠어지자 스스로 운동의 주도권을 놓아 버린다. 그들 중의 다수는 국제정세를 읽는 실력이 부족했다. 그런 나머지 적국 일본의 반성을 촉구하는 정도에 그쳤고, 미국의 도움을 과신하는 타협적이고 사대의존적인 자세를 보였다. 특히 33인의 대표 격으로 장소를 태화관으로 임의 변경하는 것을 주도한 손병희는 이미 러일전쟁 때 '일본이 패망하면 동양이 파멸한다'고 하면서 일본에 군비 1만 원을 헌납한 전력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운동의 주체인 민중에 대한 이해력이 현저히 부족했다. 민중은 자기들처럼 무슨 일을 흉내나 내고 그만 둘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실제로 그들은 태화관에 모여 선언서를 낭독하지도 않은 채, 한용운의 간단한 취지 설명으로 대신하고 곧장 요리를 들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포승에 줄줄이 달려가는 모습을 민중이 본다면 얼마나 감격할 것인지를 헤아리는 두뇌도 없었다. 그들이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인력거 대신 자동차를 요구하자 일본 헌병의 일부는 혀를 찼고 나머지는 모두 비웃었다고 한다.

법정에서 그들은 "사의 천박한 학생과 군중이 모였으니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손병희)", "무식한 자들이 불온한 일을 할 것 같아서(박희도)" 장소를 변경했다고 둘러댔다. 이 같은 점으로 볼 때 그들 33인을 '민족 대표'라고 존칭하는 것은 또 하나의 역사 왜곡이 된다. 33인을 가리켜 더 이상 '민족 대표'라고 호칭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아마 그들 자신도 이런 과분한 칭호를 바라지는 않았을 터이다. 나는 그들에게는 '국내 종교계 대표'라는 칭호를 붙이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기실 3·1운동의 주체는 국내 종교계 대표 33인이 아닌 상해와 간도의 독립운동가들과 삼천리 방방곡곡의 초동급부들이었다. 그들이야말로 비폭력 타협주의의 한계를 깨고 순수한 무장항쟁을 실천했다. 그들은 제국주의의 폭압적 본질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3·1운동'이란 용어 자체에도 문제가 있다. 조선 백성은 3월 1일뿐 아닌 3,4월 두 달에 걸쳐 200만 명이 시위에 가담하여 무려 7,500명 이상이 생명을 바쳤다. 7,500명씩이나 학살당한 대참사를 기껏 '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언어에 대한 또 하나의 학살이 아닐는지.

33인을 보고 비웃었던 제국주의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것은 정작 이것이었다. 조선 백성은 자발적으로 뭉쳤고, 뭉친 사람들 중에서 또 지도자가 나왔다. 33인은 길어야 3년의 옥고를 치렀지만 학생과 농민들은 15년씩이나 되는 무거운 형량을 받았다. 3·1운동은 '기미민중항쟁' 정도로 개명되어야 마땅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