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에 나눔과 봉사로 대한민국을 심다”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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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에 나눔과 봉사로 대한민국을 심다” -상-
  • 윤용태 기자
  • 승인 2013.12.26 15: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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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자원봉사센터 해외봉사단, 캄보디아 씨엠립주 봉사활동 펼쳐

캄보디아, 화려한 역사문화 유적인 앙코르와트와 아픈 역사의 킬링필드가 정반대 의미에서 공존하는 최빈국 중 하나...어린 학생들의 해맑은 미소는 캄보디아의 미래, 주민들의 순박한 마음은 캄보디아의 행복이다.

   
본지 윤용태 기자

충청남도와 국제우호협력관계를 맺어온 씨엠립주을 방문해 ‘지구촌 행복공동체 만들기’라는 슬로건을 걸고 충청남도 자원봉사센터 해외봉사단에 본지 윤용태 기자가 봉사 일원으로 참가해 6일간의 일정으로 펼친 다양한 봉사활동과 캄보디아는 어떤 나라이고 이 나라의 대표적 역사・문화, 현지의 상황・현실을 전하는 해외봉사탐방을 기획했다. - 편집자 주 -

충청남도 자원봉사센터(센터장 지순관) 해외봉사단(이하 봉사단) 25명은 캄보디아 씨엠립주 쿡문(Kok Moun) 초등학교와 돔댁(Domdeck) 마을을 방문해 16~21일까지 6일 일정으로 ‘지구촌 행복공동체 만들기’를 주제로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쳤다.

   
 해외봉사단이 도청 앞에서 출발하기 전에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번에 참가한 봉사단은 1365포털에 등록된 충남지역 자원봉사자 중 현지의 돔댁 마을 봉사활동에 적합한 집수리, 우물파기, 이・미용 등의 재능보유자를 중심으로 공모했으며 2013년도 활동성과 및 자발성, 일정부문 비용 자부담 등의 조건을 갖춘 사람을 선발・운영했다.

해외봉사활동 조명에 앞서 캄보디아는 어떤 나라이고 대표적 역사와 문화가 무엇인지 또한 현지의 상황과 현실은 어떤가를 알아보기로 했다.

▲ 캄보디아

   
 캄보디아 위치도
캄보디아의 정식 국가 명칭은 캄보디아 왕국이고 수도는 프놈펜이다. 인도차이나반도 동남부에 있는 베트남, 라오스, 태국과 국경이 접해 있으며 면적은 18만 1,035㎢로 남한의 약 1.8배이며 한반도 전체의 80%다. 2010년 기준으로 캄보디아 인구는 약 1470만명이다.

민족구성은 90%가 크메르족이고 그 외 소수민족으로는 베트남인, 중국인, 참족, 고산족이 있다. 공식 언어는 크메르어를 사용하는데 지식층 및 비즈니스계를 중심으로 50대 이상은 불어를, 청·장년층에서는 영어를 사용하며 종교는 불교다. 국경일은 독립기념일인 11월 9일이고 캄보디아의 국가모토는 국민, 종교, 왕이다.

캄보디아 국민들은 대다수(95%)가 불교를 믿으면서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생활하고 있고 사원을 중심으로 문화 활동과 교육이 이루어지고 불교 승려들은 사회에서 존경받는 계층으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캄보디아의 정치체제는 입헌군주제로 국가원수는 국왕이나 정부수반인 총리가 실질적인 국정을 운영한다. 국가원수는 노로돔 시하모니 국왕이며, 그는 부친 노로돔 시하누크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아 2004년 10월 29일에 즉위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11년 기준으로 국내총생산(GDP)은 159억 달러이며 1인당 국내총생산은 1039 달러다. 화폐단위는 리엘(Riel)이며 1달러당 4.034리엘(2011년 4월 기준)이다.

캄보디아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 두 단어가 앙코르와트(Angkor Wat)와 킬링필드(Killing Fields)다.

▲ 앙코르 와트

먼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돼 있고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앙코르와트는 앙코르톰의 남쪽 약 1.5km에 있으며 12세기 초에 건립됐다. 앙코르는 왕도를 뜻하고 와트는 사원을 뜻하는 합성어다.

      
 앙코르와트 전경

 

 

 

 

 

당시 크메르족은 왕과 유명한 왕족이 죽으면 그가 믿던 신과 합일한다는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왕은 자기와 합일하게 될 신의 사원을 건립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유적은 앙코르왕조의 전성기를 이룬 신에 비유할 만큼 강력한 왕권을 가졌던 수리아바르만 2세가 바라문교 주신(主神)의 하나인 비슈누와 합일하기 위해 건립한 바라문교 사원이면서 자신의 무덤이다.

그러나 후세에 이르러 불교도가 바라문교의 신상(神像)을 파괴하고 불상을 모시게 됨에 따라 불교사원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건물·장식·부조(浮彫) 등 모든 면에서 바라문교 사원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바깥벽은 동서 1.5km, 남북 1.3km의 직사각형으로 웅장한 규모이며 정면은 서쪽을 향한다. 동남아시아에서 종교 건축물들이 일반적으로 동쪽을 향하고 있는 데 비해 앙코르와트는 정반대인 서쪽을 향하고 있어 학자들 사이에 견해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앙코르와트 전경

 

 

 

 

 

앙코르와트가 차지하고 있는 면적은 약 2백십만m²이다. 지상을 상징하는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벽의 총 길이는 5.5㎞이며, 이는 다시 폭이 약 200m인 해자로 둘러싸여 있다. 해자는 힌두적 우주관의 관점에서 볼 때 대양(大洋)을 상징한다. 사원의 중앙에는 총 다섯 개의 탑이 있다. 그중에서 우주의 중심인 메루산을 상징하는 탑은 높이가 65m이다(Rooney 1997 : 129-130). 건축에 약 30년 걸렸다는 이 사원은 쿨렌산에서 운반해 온 사암으로 만들어졌다.

앙코르왕조는 13세기 말부터 쇠망하기 시작해 15세기경에는 완전히 멸망함에 따라 앙코르와트도 정글 속에 묻혀있던 것을 1861년 표본채집을 위해 정글을 탐색 중인 프랑스 박물학자가 이곳을 발견해 그때부터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웅장함과 섬세함이 함께하는 세계 최대의 종교유적으로 유럽 사람들은 앙코르 와트를 보고 ‘동양의 기적’이라고도 표현한다.

그러나 전화와 약탈로 훼손돼 수많은 불상이 조각난 채 나뒹굴고 대부분이 외국으로 유출돼 완전한 복구는 불가능한 안타까운 상태다.

▲ 킬링필드

킬링필드는 캄보디아에서 1975∼79년 4년 동안 폴 포트의 급진 공산주의 정권 크메르루주가 양민 200만 명을 학살한 20세기 최악의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된 사건이다.

      
 학살당한 사람들을 위한 추모건물(좌), 킬링필드 영화 포스터(우)

 

 

 

 

 

 

 

 

 

 

 

1975년 캄보디아의 공산주의 무장단체이던 크메르루주(붉은 크메르) 정권이 론 놀 정권을 무너뜨린 후 1979년까지 노동자와 농민의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명분 아래 최대 200만 명에 이르는 지식인과 부유층을 학살한 사건이다.

크메르루주의 지도자 폴 포트는 1975년 4월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함에 따라 약화된 캄보디아의 친미 론 놀 정권을 몰아냈다. 당시 폴 포트가 정권을 잡자 론 놀 정권의 부패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국민들은 환영했다. 그러나 폴 포트는 새로운 농민천국을 구현한다며 도시인들을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화폐와 사유재산, 종교를 폐지했다. 이 과정에서 과거 론 놀 정권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지식인, 정치인, 군인은 물론 국민을 개조한다는 명분 아래 노동자, 농민, 부녀자, 어린이까지 무려 전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00여만 명을 살해했다. 그리고 크메르루주 정권은 1979년 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캄보디아 공산동맹군에 의해 전복됐다.

이들의 만행은 캄보디아 뉴욕타임스 특파원 시드니 쉔버그의 글, ‘디스프란의 생과 사(한 캄보디아인의 이야기)’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 글은 1980년 뉴욕타임스에 실렸고 쉔버그는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이를 토대로 학살된 양민이 매장된 곳을 뜻하는 ‘킬링필드’라는 제목의 영화가 제작돼 많은 사람이 알게 됐다.

   
 유골로 캄보디아 지도를 만들었다.

한편 2011년 11월 유엔과 캄보디아 정부가 공동 설립한 크메르루주 전범재판소는 크메르루주 2인자였던 누온 체아 등 크메르루주 정권의 핵심인사 4명에 대한 재판을 시작했다. 이들은 전쟁범죄, 반인도적 범죄, 학살, 고문 등의 혐의를 받고 있다. 앞서 2010년 7월 투올슬랭 교도소 소장이었던 카잉 구엑 에바브는 징역 30년형을 받아 전범에 대한 단죄가 시작된 바 있다. 그러나 크메르루주 정권 1인자인 폴 포트는 앞서 1998년 재판을 받지 않고 사망했다.

200만 명에 이르는 지식인과 부유층이 학살된 이 사건으로 인해 현재의 캄보디아가 최빈국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인지 모른다.

화려한 역사문화 유적인 앙코르와트와 아픈 역사의 킬링필드는 정반대의 의미가 공존한 채 현재도 캄보디아에서 숨을 쉬고 있다.

▲ 현지의 상황과 현실

본 봉사단이 활동한 씨엠립주는 포장한 도로는 편도 1차선을 넘은 곳이 없었으며 주 메인도로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도로는 비포장도로다. 도로를 점유한 것은 자동차와 오토바이로 80%이상 오토바이가 차지한 것으로 보였다.

      
 화려한 도시의 불빛 속에 오토바이가 즐비하게 있다(좌), 오토바이로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우)

 

 

 

 

 또한 택시는 찾아볼 수 없었고 대중교통 역할을 하는 것은 오토바이의 뒤쪽에 사람을 태울 수 있게 늘려 개조해 이동과 운반을 했다. 이뿐만 아니라 오토바이를 개조해 상업적인 부분으로도 활용해 오토바이는 이 나라 사람들의 모든 생활권의 중심에 서 있는 핵심 기계로 보였다.

       
 씨엠립주에 위치한 고급 호텔(좌), 씨엠립주에 있는 고급 주택(우)

 

 

 

 

 우리나라의 대전시와 비견되는 씨엠립주 시내에는 5개의 신호등이 있는데 이나마 작동은 하지만, 유명무실한 채 자리를 잡고 있다. 그만큼 자동차가 없다 보니 신호를 제대로 지키는 사람도, 단속하는 사람도 없어서인 것 같다.

야간에는 주요 관광객을 상대로 한 호텔, 매점, 식당 등을 제외하고는 화려한 불빛을 찾을 수 없고 도로는 자동차, 오토바이, 자전거, 행인들로 뒤엉켜 각각의 목적에 움직이는 모습은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상황을 연출한다.

      
 화려한 불빛 속에 있는 도시의 상가 전경

 

 

 

 

 

시골로 가면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봉사단이 활동한 돔댁 마을과 그 주변의 대부분 가옥은 지면에서 공중 부양한 형태로 우리의 1층에 속하는 부분은 뻥 뚫려 있고 그 위에 사람이 주거한다. 뻥 뚫린 부분은 그냥 방치했는가 하면 가축을 키우고, 생활용품을 비치하는 등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런 주택의 특성은 이곳 마을 대부분 지대가 낮아 우기 때면 집까지 물이 차오르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런 형태를 갖췄다.

      
 비포장도로를 마차가 달리고 있다(좌), 공중부양한 시골의 주택(우)

 

 

 

 

 

또한 주택은 식물을 사용해 벽을 만들었고 이는 3년마다 교체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가옥에 철판 등 현대식 자재가 조금만 섞여도 이곳에서는 잘 사는 집으로 분류한다고 한다.

마당은 경계가 무색할 정도이고 개, 돼지, 닭 등 가축들이 차지해 내 맘대로 놀고 있다.

마을 내 드물게 우물이 있으나 보기에 도저히 먹을 수 없고 이 곳 사람들은 세면 등 기본적인 것도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로 보였다. 특이한 점은 가가호호 화장실이 없다는 점이 갸우뚱해진다.

      
 공중부양한 집 밑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 주민들(좌), 요리를 하는 곳으로 보이는 장소(우)

 

 

 

 

 

전봇대는 서 있는데 전기를 사용하는 가구는 거의 전무하고 아주 잘 사는 집만 전기를 쓴다. 인천공항에서 출발할 때 우리나라의 밑을 본 작은 도시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려한 불빛은 씨엠립주 국제공항 착륙 전의 야경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상태로 띄엄띄엄 불빛만이 어둠의 적막을 깰 뿐이었다. 본론으로 가면 이 나라는 전기가 아주 귀하기 때문이다.

이곳의 아이들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다고 한다. 이유는 부모가 아이를 생업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활용해서 그렇다고 한다. 먹고사는 삶에 처절한 몸부림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 짝이 없다.

      
 학교에 모여 있는 시골의 아낙들(좌), 학교주변에 있는 가게 중 제일 나은 가게의 모습(우)

 

 

 

 

 

또 공공의 시설인 쿡문 초등학교도 여러 가지 부족한 면이 많다. 교실의 바닥은 콘크리트고 학생들이 청소는 하지만, 모든 분진을 제거하기엔 어려움이 있어 보이며 막 뛰어놀 어린 학생들은 건강을 위협받고 있다. 교실에는 전구 하나 없고 칠판지우개가 없어 갈기갈기 찢어진 옷가지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이런 열악한 교육환경에도 불구하고 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그나마 부유층에 속하는 자녀들이다. 학교가 물이 부족해 우물을 기증받을 정도의 형편이니 일반 주민들의 삶은 얼마나 힘에 부치겠는가.

돔댁 마을과 쿡문 초등학교의 대표적 어려운 실 생활상을 나열했지만, 이 나라에서는 중간 계층에 속한다고 하니 더 못 사는 곳으로 가면 상상을 초월할 것임이 분명하다.

이런 전반적인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우리나라 5~60년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복합・다양한 현실과 삶을 그대로 옮겨 놓은 집약적 나라인 셈이라고 느껴진다. 그보다 더 심각할 수도 있다.

      
 학교 학생들의 티 없이 맑은 순수한 모습

 

 

 

 

 

 

 

 

 

 

 

 

 

하지만, 어린 학생들의 해맑은 미소는 캄보디아의 미래고 주민들이 현실 만족의 삶을 영위하면서 순박함이 녹아 있는 마음을 보면 우리가 모르는 캄보디아 사람들만의 행복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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